드림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드린다는 함축적인 말이다. 드리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재물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담기에 가장 좋은 희생제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예배를 드리게 되면 헌금을 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참 아름답고 귀한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드리는 행위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어떤 자세로 드려야하는지 올바르게 가르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왜 드려야 하는가?
교회에 오면 예배중의 헌금시간에 준비한 예물을 넣는 것을 보고 따라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견고한 신앙의 행위라는 것을 또 배우게 된다. 게다가 각종 선교나 건축헌금 혹은 구제를 위한 헌금도 열심히 드리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교회에 오래 다니면 희생적으로 헌금을 드리는 행위가 신앙생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배운 그대로 자녀들의 복을 위해 헌금행위를 가르치지만 정작, 왜 헌금을 정성껏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지를 설득력 있게 가르치지 않는다. 기껏해야 희생적인 제물을 드려야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관에 따른 근거를 언급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십일조가 모세가 세운 율법의 의무사항이라고 알고 있는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에게 모세이전의 신앙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드림에 대한 신앙철학을 깨닫는 것은 드림과 신앙과의 관계를 아는 척도일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사로잡아간 왕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자, 이를 축하하려고 나온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바친다. 살렘왕 멜기세덱은 특정지역을 다스리는 왕이 아닌 평강의 왕으로 묘사된 신비스러운 인물로서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탈취한 전리품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전쟁을 앞두고 혹은 미래에 받을 축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감사함으로 드렸던 것이다. 이후 아브라함은 백세에 난 아들 이삭을 죽여 번제의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가혹한 명령에도 군말 없이 시행하여 복의 근원이며 믿음의 조상이 되는 명예스런 호칭을 얻기도 했다.
창 28:21~22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형 에서에게 쫓겨 갑자기 집을 나와 멀고 먼 하란의 외삼촌 라반을 찾아가는 외롭고 위험한 여행길에서 불안해하는 야곱은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나자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오게만 해주신다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후손들에게 명령하여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제안한다. 이후로 이스라엘지파에게 십일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사항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야곱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족장의 아버지이자 얍복강가에서 치열한 기도의 싸움에서 이겨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은 입지전적인 신앙의 인물이다. 이처럼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감사해서 자신이 가진 소중한 예물을 아낌없이 드렸다.
십일조에 대한 율법이 없던 시대에도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정성껏 드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어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된 것이지, 축복의 조건을 걸고 예물을 드린 것은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감사만이 유일한 조건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우리를 가장 사랑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마련해주시고 기다리고 계시기도 하다. 어디 그뿐일까?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며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세세무궁토록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려야 한다.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렇다면 감사를 표현하는 최고의 행위는 무엇일까?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드리는 행위가 아닐까. 여기에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없다. 예수님도 돈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아끼는 돈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의 정도를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헌금을 드리는 마음이 감사의 표현이 되는 이유이다. 세상의 전부를 소유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재물을 원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뿐이다. 감사함으로 마음을 드리는 행위가 헌금을 드리는 행위로 대신하는 것이다.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성경에는 희생적으로 드렸다가 예수님께 책망 받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그 당시 종교엘리트라고 자처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다.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열망이 가득했던 유대인중 에서도 더욱 열성적이었던 사람들이었고, 서기관들은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경건한 행위로 성경의 필사를 도맡아했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데 있어서도 율법에서 규정한 것보다 더욱 엄격하게 제한했다. 수입의 십일조뿐 아니라 반찬이나 약으로 쓰려고 텃밭에서 기르던 야채나 약용식물마저 십일조를 드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혹독한 책망을 받은 것은 희생적으로 십일조를 드렸던 행위가 아니라 십일조를 드리는 마음의 속배와 동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행위에 있어서는 뛰어난 희생정신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생각해보아야할 것은 십일조를 포함해서 헌금을 드리는 믿음이다. 헌금을 드리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께 믿음의 행위를 보여주는 것으로, 세상을 지으시고 모든 피조물들에게 풍성하게 먹고 살만한 재물을 공급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 믿음의 행위로서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을 기꺼이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자신의 노동과 수고함으로 얻어진 수입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재정적인 환경을 열어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강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건강과 지식과 경험을 쌓기 위한 지혜를 주셨기에 가능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적지 않은 크리스천들은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있다. 자신이 고생해서 얻은 수입을 하나님이 공급해주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헌금으로 드리는 돈이 아깝고 마지못해 드리는 이가 많다. 재물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없이 형식적이고 억지로 드린 헌금이라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수가 없을 것이며 하늘나라의 창고에 쌓이지도 않는다. 단지 교회의 통장에 들어가는 돈이 될 것이다.
신 14:28~29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 다음은 사랑이다. 사랑의 여러 덕목 중에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헌금을 드릴 때 사랑의 행위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교회에 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의 가장 중요한 용도가 고아나 과부들과 같은 헐벗고 가난한 이들을 먹고 입히는 데 있음을 상기해야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모두가 건강한 노동을 통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 그렇지만 양육할 부모를 잃은 고아와 소년가장, 봉양할 자녀가 없는 독거노인, 노동력을 잃은 장애인들과 기타 스스로 생존에 필요한 수입을 얻지 못하는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 보살펴주시겠지만 우리의 손길을 통해 돌보아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 보살핌의 원천이 교회에 헌금으로 드려지는 재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불우한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이런 자비로운 마음이 없이 희생적인 종교심만을 드러내고 싶어 드린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함을 받게 될 것이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또한 헌금을 드릴 때의 필수사항은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이며 종교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삼아 십일조를 드렸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했다고 성경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온전함을 우리가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하고 깨끗한 성품을 배우고 자신에게 적용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즉 헌금을 드릴 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삶의 바탕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헌금의 출처가 정직하고 올바르게 벌어들인 돈이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드릴지라도 그 돈이 불의하고 불법적으로 벌어들였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효력을 잃게 될 것이며 도리어 책망을 받는 원인만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희생적으로 드리는 헌금만을 강조하지 헌금을 드리는 마음의 태도나 돈의 성격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랫동안 성실하게 십일조를 드려왔다 할지라도 성경에 약속한 축복이 임하지 않는다. 희생적으로 십일조나 헌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돈독한 관계를 확인하는 중요한 행위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세를 갖추어야지 놀라운 축복의 열매를 맺는 씨앗으로 사용될 것이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관찰하시기보다 내면의 세계와 동기를 감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떻게 준비하여야할 것인가?
헌금은 드리는 행위보다 준비하는 마음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겠지만, 어떻게 준비한 헌금을 하나님이 기뻐 받아주시겠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헌금의 태도는 마음을 담지 않고 드리는 것이다. 그냥 세금을 내듯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 일게다. 그러다보니 아까워서 십일조를 줄여서 드리기도 하고 재정상황이 어려우면 슬쩍 제외하기도 한다. 돈이 마음속 가장 가까이 차지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헌금을 드리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이 청소년 시절부터 잘 훈련받아 평생 변치 않을 습관으로 삼아야 돈보다 마음을 실어드리는 헌금행위로 자리 잡을 수 있다.
행 5:3~4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전 재산을 팔아 헌금을 드린 아름다운 선행 때문에 인생의 비극으로 끝나게 된 불행한 부부의 이야기를 성경은 전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이다. 그들은 초대교회에 입교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전 재산을 팔아 교회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지만 평생 만져보지 못한 큰돈을 보게 되자 그만 아까운 생각이 들어 얼마를 감추고 드렸다가 부부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맞게 된 것이다. 사실 전 재산을 팔아 드리라는 게 그 당시나 지금이나 교인의 의무사항이 아니므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말할 사람이 없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판 재산의 일부를 드렸다할지라도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의 잘못은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을 한 것에 있다. 그 원인은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인데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원인은 아무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드린데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초대교회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비일비재하다. 건축을 앞두고 있는 교회에서는 건축비용을 마련코자 부흥집회를 열게 된다. 걸쭉한 입담의 부흥사는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구약의 성경말씀을 인용하거나 희생적인 헌금을 드린 사례를 들면서 급기야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되면 서약서를 돌리면서 헌금 서약을 하라고 부추긴다. 이때 서약했다가 집으로 돌아가 현실적인 재정상황을 생각하면서 후회하는 일이 생겨난다. 그렇지 않더라도 막대한 헌금을 작정해서 드렸다가 아까운 생각이 들어 두고두고 찝찝한 경우도 적지 않다. 만약 초대교회에 생긴 사건이 지금도 그대로 재현된다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수도 없을 것이다. 성령을 속이고 줄여 들이는 십일조가 빈번하고 아까운 마음이 들어 건축을 앞둔 교회를 들어 이미 웅장한 교회건물을 자랑하는 대형교회로 옮기는 일도 다반사이다. 물론 십일조나 건축헌금을 드리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이 아닌 데 말이다. 건강하게 헌금을 드리는 행위가 신앙습관으로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려 헌금을 충동적으로 드렸다가 평상심으로 돌아가서 후회하거나 아까운 생각이 드는 이유는, 헌금을 드리는 행위가 상황이나 기분에 좌우되어서 드리기 때문이다. 견고한 믿음에 기초한 헌금행위가 된다면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였다가 드리게 된다. 특히 큰 금액이 되는 십일조나 건축헌금 등의 목적헌금 등이 그렇다. 이런 헌금은 미리 준비하고 준비하지 않는다면 쉽게 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지출계획을 짤 때 미리 예산안을 편성해서 준비하고 지출하여야 한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교회에 드리는 헌금지출이 수입의 10~20%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절제하여 다른 지출을 줄이지 못한다면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정성껏 준비하여 드리는 것만이 평안함을 유지하는 비결인 셈이다. 특히 큰 금액의 목적헌금을 드릴 때는 오랜 시간을 두고 미리 준비하거나 평소에 예비비 등의 항목을 만들어 쌓아두고 드린다면 아름다운 헌금이 될 것이다. 또한 십일조 등의 헌금을 드릴 명목이생기면 가장 가까운 주일예배 시에 드리는 것이 가장 좋다. 오래 가지고 있다 보면 다급한 일로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용돈이나 수입이 생겼을 때 즉시 드리는 버릇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돈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유일하고 강력한 경쟁자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틈타지 않도록 지혜롭게 드리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돈도 있다.
레 20:7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교회에서는 많은 돈을 드리는 손길을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하나님은 돈의 액수보다 돈의 성격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계신다. 세상의 재물을 포함한 모든 것의 소유자가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드리는 돈의 규모가 큰 관심을 끌 리가 없다. 단지 하나님은 당신을 닮아 지으신 자녀가 당신이 기뻐하시는 성품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지의 여부이다. 그 리트머스시험지자 바로 돈이며 헌금으로 드려지는 돈의 성격을 밝혀보면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면 깨끗한 방법으로 벌어드린 돈일 테고 그렇지 않고 돈을 사랑한다면 불의하고 불법적인 수단이나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두어들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정직한 노동과 올바른 방법과 수단으로 돈을 버는 태도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미련한 짓이다. 세상 사람들은 허술한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것을 탈세가 아닌 절세라고 부르며, 소비자가 눈치 채지 못하거나 도덕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면 상품의 내용을 속이거나 과장되게 포장해서 팔더라도 장사꾼의 능력이라고 추켜세운다. 농민이나 어부가 식품에 부적격한 색소를 넣어 상품성이 좋게 물들이거나 사업가가 뇌물과 청탁으로 사업권을 따내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게 해서라도 많이 벌어들인다면 능력이라고 부러워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아무리 많은 돈을 교회에 가져왔더라도 깨끗하고 정직하지 않은 돈이라며 외면하신다.
돈을 버는 방법만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나 사업의 종류도 보고 계신다. 술이나 성을 상품을 돈을 버는 유흥업을 좋아하시지 않을 것을 뻔한 일이다. 슈퍼를 하면서 담배와 술을 파는 것과 아예 접대부를 고용해서 술을 파는 것은 그 성격이 다르다. 또한 정직한 노동이 아닌 사행심을 이용하는 복권, 도박 등은 탐욕과 조급함을 노리는 악한 업종이다. 그렇지만 음란과 쾌락을 상품화해서 장사를 하는 것은 고수익의 업종이다. 고리의 이자를 받는 대부업도 하나님이 싫어하시기는 마찬가지이다. 불법적인 추심을 일삼는 사채업은 물론이지만 합법적이더라도 높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는 성경적이 아니다. 물론 서민의 피해를 입히는 불법적인 사업행위를 정부에서조차 법으로 정해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지만 이를 무시하는 지하경제는 우후죽순으로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사탄은 탐욕과 음란, 폭력, 쾌락이 난무하는 지하경제를 이용해서 불나비처럼 빠져드는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영혼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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