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사용하는 하나님의원칙(6)-나눔(펌)
자신의 수입을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과 나누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자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렇지만 성경의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우리는 가난한 이를 돕는 일에 인색하다. 교회조차도 수입의 3%미만을 구제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니 그 심각성에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가난해서 못 먹고 못 입던 시대에서 자신과 가족만을 바라보고 살아와야만 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불행이나 가난에 관심조차 둘 형편이 안 되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2만 불을 넘나들며 세계에서 12번째를 자랑하는 경제대국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수입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지 몰라도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인간다운 삶은 차치하고 생존을 위한 싸움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가장들은 가족들을 굶기지 않고 먹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고위공무원격인 관료들조차 굶는 일이 허다했으니 일반 백성들의 그 곤궁한 삶을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감사하게도 이제 우리들은 일용할 양식을 충분히 떼어놓고서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만한 여력이 있다. 그렇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열어놓지 않는다는 게 나누어줄 재물이 없다는 것보다 더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마 18:32~34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6.25전쟁이 끝나고 폭격으로 인해 모든 산업이 피폐해진 우리나라는 해외 각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았다. 특히 미국의 아낌없는 원조물자는 우리 사회가 다시 일어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이 부자나라라서 나눌 재물이 적지 않아서도 이유이겠지만 불행을 당한 이웃을 도와주는데 헌신적인 기독교적 이념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일본도 경제대국이지만 가난한 이웃나라에게 나누어주는 일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과 비교하면 재물이 많다고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어려울 때 외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일어났지만 그 은혜를 갚는 일에는 여전히 소홀하다.
나눔은 영원한 삶의 필수조건이다.
마 25:44~46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곤궁하고 불쌍한 이들을 도와주며 자비를 베푸는 것이 가진 자의 배려라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고 말하고 계신다. 재물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어 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다는 것은 세상의 법에 국한될 뿐이다. 하나님의 원칙은 우리가 가진 재물은 하나님의 소유라고 밝히시며 당신의 목적대로만 사용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 목적은 일용할 양식과 의로운 열매를 위한 씨앗이며 의의 열매는 선교와 구제에 사용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구제는 가진 자의 배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인 셈이다. 위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천국의 자격이 없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세상의 법에 의하면 사업을 해서 발생한 수익의 일부는 세금으로 나라에 내게 되어있다. 정해진 세금을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며 이를 어기면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래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법이 두려워서라도 이에 따라야한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에서의 처벌은 심판대에 서는 그날이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주일성수를 비롯한 신앙의 행위를 성실하게 지키면 천국에 가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성경에 밝힌 천국의 자격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위의 성경말씀처럼 구제를 소홀히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다. 소중한 자신의 돈을 남에게 주어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야하며 어렸을 때부터 잘 훈련되어 습관을 들여야 할 일이다. 자신뿐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들과 천국에서 함께 살고 싶은 게 모든 부모들의 소망이겠지만 자녀에게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가르쳐주고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허황된 꿈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돈을 남에게 주어버린다는 것은 오랜 훈련으로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면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면서 모든 생물들이 충분히 먹고 살고 있는 환경을 만드셨다. 그래서 각자 자신에게 부여한 능력을 발휘하여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게 하셨다. 그래서 모든 생물들은 뛰어난 감각기관과 신체조건을 이용하여 먹이를 수확하거나 사로잡을 수 있게 하셨으며 인간에게도 탁월한 지능을 주셔서 건강한 노동력만 있다면 생존할 수 있게 하셨다. 이는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무인 셈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불행한 사건으로 양육 받고 보호받아야할 보호자를 잃어버린 부모가 없는 고아나 소년가장이 있으며 늙고 병들어 노동력을 잃어버린 독거노인과 장애를 입어 노동력이 없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도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생존을 직접 책임져 주셔야하지만 보호와 양육의무를 우리에게 맡겨주셨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이외의 남은 재물로 그들을 도와 더불어 잘 살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을 얻을 탁월한 능력을 주시고 환경을 열어 주셔서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고 남은 재물들을 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이 역시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돌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작은 일에 충성한다면 더 많은 재물을 맡겨주시겠다는 약속도 해 주셨다. 하나님이 돌봐주어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 맡아하니 그런 능력과 재물을 주시는 것은 마땅한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에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자신의 능력과 배려로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교만한 마음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많이 하고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음을 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하나님은 나눔을 실천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세상적인 경험이나 지혜에 의하면 부자가 되는 길은 절약하고 아껴 쌓아두어야 하는 것이 기본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자들은 지독한 구두쇠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기도 했다. 사실 돈이 없는 사람이 부자가 되려면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끼는 성품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세상에서 배우고 경험하는 지식이고 지혜이다. 그렇지만 예외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세상의 경험에서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는 암시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세상의 법칙을 깨는 일처럼 보이지만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생겨나는 현상 역시 세상의 법칙에 자연스레 포함되어 있다. 자비를 베풀고 나누어주는 사람이 곤궁해지기는커녕 더 부유하고 번창하는 현상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은혜가 초자연적인 현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삶 가운데서 풍성하고 성공적인 삶을 경험하게 하신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은밀히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자신의 지혜와 노동력을 최대한 기울일지라도 거대한 자연의 힘과 세상 제도, 재정적인 환경 등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자연만을 바라보고 농사를 짓는 농부나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어부라면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의 유한함과 왜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저수지를 파서 물을 모으는 것인 가뭄에 대비하는 인간의 지혜지만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시지 않는다면 이 또한 무용지물이 아닌가. 수산자원이 고갈이 되어 이제는 바다에서 양식을 하는 것이 사람의 지혜지만 바다의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져도 물고기가 떼죽음당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만 자연의 놀라운 힘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거대한 세상제도나 재정환경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밖에 있는 것들이 부지기수이다. 정부나 기업, 시민들은 지금의 불황을 호황으로 바꾸려고 애를 쓰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넘쳐나는 실업자, 악성채무자 기르고 새롭게 생겨나는 빈곤층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우주를 운행하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하나님이 도와주시거나 재정환경을 조금만 풀어주신다면 엄청난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일이 어렵지 않다. 초자연적인 간섭이 아니라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일으키게 해서 도와주는 마음이 생기게 한다면 얼마든지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집트백성들은 자신의 소중한 금품을 갖다 바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어 돕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주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이 하는 사업이나 직장, 투자의 환경을 열어주시거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도와주게 한다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자비를 베풀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들을 도와주시는 모습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유이다. 하나님을 감동하게 하는 사람은 삶이 평안하고 형통하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시면 물신양면으로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물론 이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벳세다 광야에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무리들을 먹이는 광경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떻게 나눔을 실천할 것인가?
고후 8:14~15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물의 사용도 부족한 자와 남은 자가 없이 고르게 사용됨을 원하시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이 쓸 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케도니아 교인들이 넘치는 헌금을 모은 것은 그들의 삶이 부유하고 넉넉해서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쓸 것도 부족했지만 아끼고 절약하여 기꺼이 헌금의 대열에 동참했던 탓이다. 이처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말만 풍성하지 정작 열매는 없는 쭉정이와 같은 삶이 될 뿐이다.
불쌍히 여기는 성품을 가꾸어라.
우리가 나눔에 소홀한 가장 주요한 원인은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부족해서이다. 서울역에서 노숙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양하지만 측은히 여기기보다 경멸하거나 더럽게 여기는 생각들이 더 많다. 가게를 하다보면 장애인들이 소품을 팔러오더라도 그들을 불쌍히 여겨 사주기보다 상품이 너무 비싸다는 핑계로 단호하게 거절하는 이가 적지 않다. 어디 그뿐일까? 일 년에 한번뿐인 크리스마스시즌에 구세군 냄비의 종소리가 들리면 지갑을 꺼내들기보다 둘러가는 일이 더 흔하다.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우리는 남을 도와주는 일에 인색하다. 사실 측은히 여기는 성품을 타고 난 사람도 있지만 길러지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가 선행을 하는 것을 보고 자라면 자시고 커서 이런 행위를 따라하는 이유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키워주려면 솔선수범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방법인 셈이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성령님께 요청한다면 이런 마음이 커지게 된다. 자비로운 성품은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대표적인 것으로 자녀인 우리가 닮아가기를 애타게 바라시는 탓이므로 우리가 기도로 요청한다면 누구나 받아 가질 수 있다. 선하고 깨끗한 성품으로 변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아주 중요한 요건이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성령님과 동행한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의 성품을 우리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견고한 믿음을 실어라.
세상에는 아름다운 기부로 세인의 귀감을 사는 이도 적지 않다. 평생 김밥을 팔거나 삯바느질을 해서 모은 돈을 대학에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내어놓거나 많지 않은 월급을 떼어 낸 돈으로 불우한 소년가장이나 독거노인의 식량으로 맡기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이들의 소식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오며 마음이 환해지곤 한다. 물론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 모르게 해달라는 이도 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장학회를 만들어 이름 석 자를 알리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다.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든 아니든 피땀 흘려 모은 소중한 돈을 쾌척하는 이들의 손은 아름답기만 하다.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유지처럼 받드는 교회에서는 세상보다 더 많은 나눔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과 다른 점은 나눔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아름다운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행을 빛내기 위한 속내라면 위의 성경에서의 경고가 현실화되는 일이 생길 것이다.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종교행위의 원천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일이 생기는 것들은 마음이 거짓된 자들이 있음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정작 속내는 자신의 내세우고 싶어 한다면 천국 문 앞에서는 아무런 효험이 없을 것이다.
돈과 연관되는 믿음이란 자신이 소유한 돈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시며 자신은 이 돈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고 관리하는 관리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 사용하거나 자신의 임의대로 소비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불쌍한 이웃을 위해 드려지는 아름다운 돈이라도 이러한 믿음이 전제되어있을 때 더욱 빛나는 것이다. 그리고 향기로운 제물과 의로운 열매가 되어 천국곳간에 켜켜이 쌓이며 빛나는 면류관과 엄청난 상급을 받는 요건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돈의 액수를 보시기보다 내면의 상태를 날카롭게 관찰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적은 돈일지라도 견고한 믿음이 실려질 때 더욱 빛이 발하고 향기나 나게 마련이다.
나눔의 재원을 지혜롭게 준비하라.
나누는 것에 인색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누는 습관이 들지 않았기에 어색해하거나 미리 준비하지 않았기에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준비하지 않아 즉흥적으로 드린다면 그 당시에는 기분이 좋을지 모르지만 돈의 출처에 따라 후회가 뒤따라올지도 모른다. 그 돈이 여윳돈이었다면 상관없지만 관리비나 학비처럼 꼭 써야 할 돈이었다면 또 다시 돈을 마련해야하며 빚을 내야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드리는 헌금도 그렇지만 순간적인 충동에 못 이겨 드리는 현상을 하나님이 감동하셔서 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회지도자가 적지 않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용도가 있는 돈이라든가 빚을 내어 드리게 하는 것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불우한 이웃에게 나누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는 해도 마음이 우러나서 기꺼이 드리는 것을 선호하신다. 그러기에 나누고 싶다면 미리 준비하여 나누거나 여윳돈으로 흔쾌히 드려야 할 것이다.
잠 11: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하나님은 드리는 행위도 생각하시지만 마음의 동기와 속내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나눔을 위해 수입에서 미리 떼어내어 준비하여 두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가 와서 드리게 된다면 기쁜 마음이 지속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고 있을 때부터 마음속에 기쁨을 넣어주시기 때문이다. 큰 액수가 아니더라도 수입의 1%라도 떼어내 준비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수입을 더 크게 해주시고 재정환경을 열어주셔서 더 큰 금액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수입의 일정부분을 떼어 적립하여 드리는 것을 습관으로 삼는 것을 보여준다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그 행위자체가 다른 무엇과 바꿀 수없는 커다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은밀하게 드려라.
마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선한 행위를 자랑하고 싶어 하며 칭찬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드리는 헌금조차 드린 사람의 이름이 교인들에게 불리어지며 주보에 기재된다. 만약 호명되지 않고 주보에 발표되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적은 사람들이 헌금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도 교회의 관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알려지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구제까지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는 이미 사람들에게 칭찬 받은 것으로 상을 받은 바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상급을 받고 의롭다고 칭찬을 받을 수가 없어진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훈이 무색하게도 기부자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기부금의 액수는 형편없이 줄어드는 게 작금의 형편이다. 그렇지만 애써 드린 구제가 아름답게 되어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늘나라에서도 상급이 있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하나님은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셨다. 세상에 드리는 구제조차 익명으로 드리는 아름다운 이들이 적지 않은데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누는 구제조차 자신의 의를 드려내려 한다면 하나님이 실망하실 게 뻔하다. 자신에게 공급된 돈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인 것은 늘 잊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신실하게 사용하는 것이 충성된 종이 응당 해야 할 의무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