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허망하다는 말.
"사는 게 허망하다"는 말
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들은 말 가운데서 언제 누구에게 들어도 가슴이 찡하며 아프게 느껴지는 말 한마디가 있다. "사는 게 허망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주 사는 게 허망하다고 말한다. 혹은 사는 게 재미가 없다고도 말하고 희망이 없다고도 말하지만 뜻은 같은 뜻이다. 사람들이 그런 말 하는 것을 들을 때 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찡한 아픔을 느끼곤 한다.
더구나 그런 말을 내가 보기에도 불행하고 고생스럽게만 여겨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만 대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유명한 사람들도 꼭 같은 하소연을 하는 것을 듣게 될 때는 가슴이 찡한 정도가 아니라 어떤 절망감 마저 느끼게 된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허망하다"
"사는 것이 아무 재미가 없다"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께서는 어떠하신지 궁금하다. 독자께서도 그렇게 느끼실 때가 있는지.
연휴의 마지막 날 밤, 고향 방문도 끝나고 재미 있는 연속방송극도 다 끝이 나서 TV를 끈 후 내일 다시 일 나갈 것을 생각하며 침실로 잠을 자러 들어갈 때 침실 어느 구석에선가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던 밤 고양이 한 마리가 잽싸게 도망쳐 나가듯 불현듯 가슴 한 구석을 파고 드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허망한 느낌.
아직 말도 못하는 갓난 아기가 깜깜한 한밤중에 갑자기 열이 높아지며 가녀린 신음 소리를 내며 앓을 때, 그 순간 맵고 차거운 바람처럼 가슴속을 파고 드는 예기치 못한 불안과 절망감. 마치 발 밑이 보이지 않는 절벽 허공 중에 혼자 어린 아기를 안고 매달려서 "살려 주세요" 소리 지르고 있는듯한 다급한 심정.
다니고 있는 직장이 불경기로 일거리가 없어지자 수런대는 감원소문, 그런 소문을 처음 듣는 순간 누군가 내 가슴팍을 거역할 수 없는 돌멩이 같은 것으로 콱 질러대는 듯한 허망하고도 절망적인 느낌.
오랜만에 동창회가 열려 떠들어 대고 있는데 그 중에 한 놈이 갑자기 화제를 바꿔 "야, 걔 있잖아, 수학선생한테 매 맞다가 도망가면서 알밤 먹였다가 정학 당했던 놈 말야, 걔가 죽었대 암으로"라고 말 할 때, 그 말을 듣는 첫 순간, 아무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비수로 섬뜩 가슴팍을 찔리는 듯한 서늘한 느낌.
이 모든 허망한 느낌은 모두가 다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는 그 어떤 어두운 삶의 그림자로 말미암는다. 우리들의 인생에는 분명 그 누구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그런 불가항력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불가항력의 세계는 그것이 '세계'라는 말로 불리워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임이 틀림 없는데도 실제로는 낯 동안 비어 놓았던 내 작은 방안 어디엔가 숨어 있기도 하고 혹은 무심코 뒤적이던 신문에서 낯 선 사람의 부고 안내문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 거짓말 처럼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것은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림자처럼 늘 나와 같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아는 척 하려고 조차 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낯 선 사람을 스쳐 지나가듯 사람들은 때때로 분명히 느끼고 있는 이 '인생의 허망 감'을 모르는 척 스쳐 지나가려고 한다. 그것과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정면으로 딱 부딪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는 게 허망하다'는 탄식이 흘러나오게 되기 전 까지는 사람들은 그 놈을 못 본 체 하려고 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일을 계획한다. 돈을 더 많이 벌려고 한다. 더 좋은 차를 사서 타고 다녀본다. 더 많은 물건을 사들이고 더 좋은 화장품으로 얼굴을 화장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쁘다는 말도 듣고 부러움도 사고 인기를 얻고 칭찬을 들으려고 한다.
파티를 열고 웃고 떠드는 동안은 그 '인생의 허망 감'이라는 놈은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돈이 막 신나게 벌리고 있는 동안에도 그 놈은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BMW나 벤츠, 캐딜락을 새로 사서 타고 다니는 동안에도 그 놈은 감히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 아, 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먹이며 칭찬하고 부러워 할 때 그 '인생의 허망 감'이라는 놈은 절대로 콧배기 조차 내밀지 못한다.
그래서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이제 그 '인생의 허망 감'이라는 놈을 아주 정복해 버린 줄로 생각한다. 그리고 안심하고 행복하게 뽐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데 그 놈은 절대로 나로부터 한발작도 떠나간 것이 아니었고 더구나 나에게 정복당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때가 있다.
어느 날부턴가 밥 먹은 뒤 위장이 기분 나쁘게 진무르 듯 해서 병원에 가 진찰을 받게 되었을 때 그때 진찰하는 의사의 언뜻 밝지 못해 보이는 순간적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보게 되는 순간, 아, 아, 저 정복해 버린 줄 알고 있던 바로 그 '인생의 허망 감'이라는 놈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 놈은 결코 없어졌던 것이 아니다. 도망갔던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놈의 머리카락 한 가닥도 결코 정복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인생의 허망 감'이라는 그 놈은 돈을 가지고 정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그 놈이 내 차의 바퀴 밑에 깔려 없어지는 일도 결코 없었던 것이다. 명예로도 권세로도 그 놈은 결코 정복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인생의 허망 감'이라는 얼굴로 나타나는 그 놈의 정체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죽음!"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에는 여러 가지의 죽음이 있다. 작게는 기분이 팍 잡친다고 할 때의 일상적인 기분의 죽음이 있다. 공부하는 학생이 때때로 공부 할 의욕을 잃어버리는 의욕상실의 죽음도 있다. 사업하는 사람도 때때로 사업의욕을 잃는 죽음을 경험한다.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애정을 끊고 죽음과 같은 이별을 고하게 되는 그런 죽음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죽음은 자기 자신의 육체의 죽음이다.
그런데 답답한 일은 그 절망적인 육체의 죽음이 도대체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왜 육체는 꼭 한번은 죽어야지만 되는가?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
성서에 의하면 육체의 죽음은 영혼의 사망으로 부터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만약 죽은 영혼이 되살아날 길이 있다면 반드시 죽을 육체도 죽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영생론이다. 세상 쪽에서 볼 때는 '가능성'의 종교적 교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 기독교의 영생론이 믿는 자들 사이에서는 가능성이 아닌 사실이 되고 있다는 점이 기독교와 세상과의 근본 차이점이다.
기독교인이란 바로 지금 이 순간 부터 이미 영생을 누리고 있다고 믿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곧 기독교인이란 저 끈질기게 따라 붙어 떨어지지 않던 '인생의 허망감'이라는 놈을 뿌리채 뽑아 버리고 사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이관희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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