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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gracegracr 2008. 3. 27. 16:19
자유의지와 믿음

                               ♧ 어거스틴 ♧

1.서론
*마틴루터와 칼빈에게 영향을 준 어거스틴.
*어거스틴의 은혜관(은혜교리)-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불가결함(은혜).

2.타락전의 인류
*타락전 인류는 올바르고, 선하며, 의지는 자유로웠다.
?크게 만족하는 맘으로 흔쾌히 하나님을 섬겼다. 그때에는 의지가 진정 자유로웠고 죄와 악의 노예상태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타락적 인류는 죄를 지을 능력과 짓지 않을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 상태.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 죄를 짓지 못하는 무능력은 없었다. 왜냐햐면 하나님은 불변하시지   만 인간은 늘 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영화롭게 된 상태(천국에서의 상태)는 단순히 타락전의 인간 상태가 아닌 더 완전   한 상태, 즉 죄를 짓지 못하는 상태로 보호받게 될 것이다.

*어거스틴은 타락의 원인을 “교만”으로 보았다.
교만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악하다는 점을 간파한다. 그는 실제적인 죄가 이미 타락한 피조물들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확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금단의 열매를 먹기전에 이미 타락했다.

이렇게 악한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피조물이 어떻게 갑작스럽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타락과 관련된 큰난문이다..

→펠라기우스-아담의 죄는 아담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후손들에게는 전가되지 않았다고 봄.
→어거스틴-아담의 죄는 혼자만의 죄가 아니라 온 인류를 대표한(포함한)죄로 말미암는 타    락이다..

3.타락의 결과들(필립 샤프의 어거스틴이 밝혀낸 타락의 여덟가지 결과들)
1)타락 그자체가 죄의 결과이다. -사람은 포세 페가레를 지닌 존재로 피조되었으며 처음부터타락할 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또한 타락전에 가졌던 모든 좋은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2)자유의 상실이다. -타락의 결과 인간은 악의 속박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3)지식의 장애이다.
→타락전 지성상태-①정보를 옳게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분석하는데 있어서 정확하고 탁월                       함.
②그러나 하나님같이 전지한 것은 아니며 타락전에도 인간의 지성은 배   움을 필요로 했     고 배우고 익히는데 있어서 힘들지 않았음.
→타락후 지성상태-①여전히 지성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타락전만큼 배우고 익히는데 있어     서의 편이성이 상실됨.            
   ②명확하고 분명하게 사유할 수 있는능력이 훼손되고, 논리적 오류를 범하기 쉬움.

4)하나님의 은혜의 상실이다. -타락전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선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아듀토리움,(하나님의 은혜)을 늘 제공 받고 있었다. 그러나 타락후 이러한 은혜가 상실되었다..

5)낙원의 상실이다. -에덴에서의 추방이다..하나님과 직접적인 임재와 교제, 그리고 수고없이 누릴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추방되어 온갖 고생과 고통의 환경으로 저주 받게 됨.

6)정욕의 현존이다. -타락전의 인간의 의지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하나의 의지밖에 없었다. 그러나 타락후 인간은 감각적인 것에 대한 선호인 정욕의 출현과 함께 이 정욕에 지배당하며 살게 된다.

7)육체적인 사망이다. -타락전 인간은 죽을 능력과(포세모리) 죽지않을 능력(포세논모리)이 있었다. 그러나 타락후 인간은 죽을 가능성에서 필연성으로 바뀌게 되었다.
생은 무덤을 향해 쉼없이 나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죄의 정가표이다.

8)유전되는 죄책이다. -법을 어긴자에게 내려지는 필연적인 형벌이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일류에게 전가됨.

4.자유의지의 성격
*어거스틴은 타락전과 후에도 사람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를 가리켜 스스로 자발적인“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한다.
(예)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결정), 죄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결정))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으로 타락한 자신을 회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   라 선을 추구하기에도 부족하다.

5.은혜와 자유
*어거스틴은 사람이 구속함(중생)을 받기 전에는 자유로이 옳은 일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유(구속함)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자유케 하시는 은혜”-는 그의 예정관과 결부 되어있다.
그는 하나님이 악한 의지를 선한 의지로 바꾸신다라고 말한다. 그분은 택함받은 자를 위해 그렇게 하신다.누가 믿을 것인지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한 모든선택관들을 삼가면서
“믿기 때문에 택하심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믿을 수있도록 택하심을 받는자들.그들로 하여금 택하심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제대로 이해하자,”

?펠라기우스--하나님의 선택에 관해...그분은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 흠없고 거룩해질 자가 누구인지를 미리 아셨고 그 때문에 그 같은 예지 가운데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들을 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에 반해 어거스틴은 선택과 예정이 거룩함에 이르기까지 미친다고 주장했다.“그러므로우리를 예정하셨을때 그분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게 만드실 자신의 사역을 미리 아셨다.”
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따라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그분이 우리 신앙의 시작도 주관하셨다. 왜냐하면 믿음 그자체도 그분의 부르심에 앞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것은 우리가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전에 주님을 꺼려하는 죄인을 자발적으로 주님을 원하고 섬기고 싶게끔 만드신다.(억지로 그 사람의 의지를 무시하거나 꺾어서 행하시지 않으신다.)

6.결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타락후에도 그것은(자유의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는 악에 종속되어 악한 선택만 할뿐이다. 어거스틴은 이와같이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신의 의지도 자유의 개념으로 본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인간의 회복) 선에(그리스도 안에서) 종속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어떤 공로나 선행적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인간의 완고하고 완악한 마음을 바꾸어 스스로(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을 추구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말한 자유의지이다.
성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전 인류는 첫사람인 아담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제로 아담의 본성을 조만간에  두 도성-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두 부분으로 예지 예정하셨다. 어거스틴은 "우리는 다만 태초에 창조된 첫사람 안에 하나님의 예지 속에서 전인류에 관계된 이 두 도성 혹은 두 사회의 토대가 놓여있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의 역사관을 통해 우리는 예정을 통해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주권을 볼 수 있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기독교적 신앙이 자유의지에 대한 어떤 여지를 필요로 하고 있기에 숙명론에 몰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인간이 자유의지의 노력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믿었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결국 우리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그가 선택한 자들을  그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그들의 영혼에 역사하실 뿐 아니라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자유로이 관여 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의 처분에 따라 인간의 意向을 악하고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돌아서게 할 수도 있고 그가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실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역사의 全過程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태초로부터  누가
그의 자유롭고 분에 넘치는 은총을 받을 것인지를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의 대리인인 전도자들을 통해 그가 선택한  자들을 부르고 확증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히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만 구원 받게 될것이다.  은총은 불가항력적인 설득력이요 마음을 끌어  당기고 기쁘게 하는 것이며  무가치한 것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 쪽으로 중재해 주는 강력한 動因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 있어서 예정과 관련이 있는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 개인과 歷史의 구원을 위한 결정적인 요인이다. 성 어거스틴의 엄격한 예정 사상을 숙고하면서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심각한 질문을 한다: "만일 자연인이 죄의 불가항력적인 성향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면 성 어거스틴처럼 인간의 책임성을 믿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은 모든 상황은 하나의 웅대한 계획 속에 각각의 자리를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자비는 不可解한 방법으로 역사함을 믿는다. 마르쿠스(R. A. Markus)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죄와 구원이라는 면에서 두 부류의 인간들 또는 두 국가로 분명히 정의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주론적인 면에서 이해한 "내부인"과 "외계인"으로 구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불가해한 하나님의 심판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결국 인류는 불가해한  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두 부류로 분리된다. 어거스틴은  바울이 말한 로마서 9장 8절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그가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인간적인 연구로는 접근 불가능한 어떤 비밀스러운 정의의 행위라고 지체없이 확고 하게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눈에 거슬리고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신앙이 없다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의문과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성 어거스틴처럼 하나님을 확고하게 믿는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예정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요약해 보면,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근본적이며 기독교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역사를 두 도성의 발전 속에서 하나님이 예정한 섭리적인 계획에 따라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 키이스의 말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神曲의 줄거리(Plot)가 우리를 포함한 연기자(Performer)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 속에 영원 전부터 존재해 있었다고 믿는다. 연기자들은 이 줄거리(Plot)를 현상계의 세목들 속에서 수행할 능력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그 드라마는 계획된 대로 전개되어 나간다." 그러므로 이 예정론은 분명히 세계사를 영원히 예정되어 있는 계시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의 말처럼 "이 현재 역사, 즉 문화와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있는 現時代의 歷史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그의 나라를 실현하는 계시과정에 있어서의 하나의 요소임에 틀림 없다."
아무리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도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이 모든것을 다 알고 계신다.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아무리 있어도 그것은 곧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결과가 이미 정해져있는 것이다.



라는 것이 칼빈의 교리입니다. 예정론이죠. 그러나 이것은 아주 아주 전체적으로 본것 뿐입니다. 감리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다. 포인트를 어디에 두는 것이냐 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다 아시겠지만 그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고 그것에 전혀 터치를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으나 결국 그 자유를 책임져야 합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느날 좋은 느낌이 들어 심심해 만들고 우리를 괴롭히려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아름답고 하나님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좋은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죄를 짓는 것의 나의 선택입니다. 주님이 죄짓게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든 일을 다 하셨다고 할지라도 인간 편에서 그 구원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속수무책이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와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인 믿음의 역할이란 실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고 행하기 전에 인간이 반응하는 마음의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에 마음 속에 있는 그 세 가지 기능이 그 제시된 메시지에 반응하여 분석하고 판단하며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세 가지 기능들이란 다름이 아니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이다. 지성이란 이해하고, 인식하고, 판단하며, 분별하는 기능이다. 감성이란 소원하며, 느끼며, 충동하는 감수성의 기능을 말한다. 그러나 의지는 그러한 마음의 기능들의 소리와 느낌을 듣고 나서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기능을 말한다. 이 마음의 기능들 중에서 의지의 기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의지의 선택이 없이는 그 사람의 생활방향이 결정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는데 그의 마음 가운데서 그가 포기해야 할 한 가지 문제 때문에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지성은 그에게 그것은 죄니 반드시 버리고 예수는 따라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그의 감성은 다르게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마음 속의 소원과 감정은 그 습관을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느낌과 충동은 그 죄의 재미와 쾌감을 버릴 마음이 없다고 끝까지 사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재미를 버리면 세상살이에 무는 맛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성은 계속 말하고 있다. 그 잘못된 습관은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장애물이라고 하면서 버리지 않고서는 결단코 거듭날 수가 없다고. 그 죄를 버리지 않고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고 진리를 깨달은 지성은 역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성도 계속적으로 반박하면서, 이러한 재미있는 것을 포기하면 생활의 만족이 없게 될 것이요, 결국에는 좋은 것들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세상을 사는 의미와 행복이 전혀 없게 될 것이라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자, 이렇게 마음 속의 두 기능인 지성과 감성이 전쟁을 하고 있다면, 과연 어떻게 해아 이 싸움을 해결할 수가 있겠는가? 해결 방법은 한 가지 길 밖에 없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의지가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 매일 매순간 수백 번씩 진행 중에 있다. 도덕적인 결정이든지 일반적인 생활의 결정이든지간에 말이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과정이 너무 간단하게 지나가 버린다든지 아니면 자동적이어서 잘 인식하지도 못한 채 지나가 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의 결정은 너무 중요하여 결국은 우리의 영생을 결정짓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죄로 인하여 몹시 약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의지를 사용하여야 하는데, 바로 이 의지가 죄로 인하여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후서 2:26에서 “마귀의 뜻대로 그에게 사로잡혔던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서 깨어 나올까 함이라” (킹 제임스 성경 번역)라고 말씀하셨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은 그들의 의지가 마귀의 뜻에 사로잡힌바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인간은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에 내어 맡겨질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여기에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초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의지의 힘을 강하게 할 수 있는가이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너무 약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함께 하셔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야 내 자신을 굴복하여 의심과 마귀의 올무인 죄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라고. 자기 자신의 과거의 실수들과 좌절되어 버린 결심들을 기억하면서 인간들은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희망이 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가 있으시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선택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의 의지에 놀라운 힘을 주시게 되는 것이다.
육중한 고철들을 들어 올리는 기중기의 끝에는 강력한 지남철이 달려 있다. 그러나 그 지남철에 전류가 흐르지 않으면 원하는 고철들을 들어 올릴 수가 없다. 기중기의 끝을 아무리 무거운 쇠들에 갖다 대어도 전혀 끌어 올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 전기의 전류를 보내면 그 지남철이 힘을 발휘하여 그 무거운 고철들을 번쩍 들어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의 힘도 꼭 마찬가지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의 전류를 받아야 우리의 의지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행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2)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실 일이 없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에서, 사단의 올무에서 벗어나 해방되기를 간절하게 원지 않는데 있다. 죄의 습관들과 세력에서 헤어 나오기를 온 마음을 다하여 소원하지 아니한다. 어느 정도 원하거나 희망할지는 모르나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어달릴 정도로 심각하게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지를 강제로 꺽으시거나 억지로 힘을 주실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우리가 협력하는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 의지를 바치며 협력하지 아니하면 그 크신 구원의 능력도 의미가 없어진다. 자녀들이 자기의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부모들이 아무리 도와주려고 해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여기에 제 의지가 있습니다. 죄의 힘으로 연약하여지고 삐뚤어진 저의 의지를 주님께 드립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힘이 제게는 없습니다. 저의 뜻과 저의 의지를 굴복하오니 주께서 고쳐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저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 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의 마음의 기능 가운데 의지의 힘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러나 이 기능이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항상 충전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바라는가?

내용출처 : www.sostv.net


기독교 역사상 자유의지의 문제는 기독교의 핵심을 건드리는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이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 속에서 생각하게 되는 내용이다. 자유의지의 문제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듯이 하나님이 인간을 기계처럼 만들지 않았다고 말할 때 그 증거로 내어놓을 수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렇다면 구원에 있어서 이 자유의지가 어떻게 반응되어지는가는 아주 흥미롭고도 중요한 테마이다.
구원에 있어서 조직신학적인 증명과정 또한 중요하지만 특별히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논할 때 그 경계선에 있으며 예민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될 때 인간의 의지는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아는 것이 구원의 주체와 객체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등장한 개혁가들은 거의가 이 문제를 다루었다.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 주의자들과 논쟁한 중앙에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 루터 또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논쟁하는 가운데 발표한 책이 '노예 의지론'이다. 칼빈도 그 시대의 피기우스에 대항하여 '기독교 강요'와 '의지의 속박과 자유'라는 책에서 인간의 의지 문제를 다루었다.
이처럼 역사상 이어져온 그 논쟁들을 살펴보고 그 가운데 올바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고 부흥을 기대하는 오늘의 시점에 상당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 어거스틴, 칼빈이 자유의지에 대해 어떤 주장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이 주장들을 보기 전에 그들이 상대했던 시대적 대적자들을 먼저 살펴 보려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를 알아야 하되 오늘날 또한 우리의 지향점을 흐리게 하는 대적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Ⅰ. 서론

1. 문제제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보면 신기하게도 만물(萬物)이 조화와 질서를 이루고 있는데, 그 조화와 질서를 보니 그것을 가능케 하신 전능자가 계실 수밖에 없으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 우주를 살펴보면, 별들의 움직임이나 사계절의 변화, 또한 물은 아래로 흐르고 구름은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이 조화롭고 합리적인 면들도 있지만, 부조화스럽고 불합리한 일들도 때로는 발견되기도 한다.
때로는 눈이 멀거나 듣지 못하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고, 머리가 둘 달린 송아지가 태어나기도 하며, 폭풍이 불고 해일이 몰아쳐 수많은 사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죽기도 할 뿐 아니라, 지진이 일어나 거대한 도시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도 한다.
'왜, 때아닌 재난이 발생하여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는가?', '왜, 사람들은 병이 나서 고생하며, 결국에는 죽고 마는가?', '왜, 원치 않는 전쟁이 일어나며, 왜, 굶어죽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가?' 하게 될 때, 이 세계에 발견되는 질서의 정연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던 사람들도 혼동에 빠져버리고 만다.
때로는 의가 실종되고, 악이 세계를 장악해 버릴 듯한 기세를 보이기도 하며,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들이 생기며, 악을 밥먹듯 하는 자들이 의를 위해 살기로 결단한 자들보다 더 형통해(?) 보이기도 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소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는 살아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서 '그 공의의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신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예정을 말 할 때 예지예정론을 말하며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에게만 관심을 보이지, 멸망당할 자의 예정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예정된 성도들은 끝까지 지키는 보존의 은총을 강조하였고 예정과 함께 인간의 책임으로서의 자유의지의 역할을 함께 강조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타락 후의 예정을 말한다. 창조시부터 예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 후 구원받은 자를 예정해 놓았다는 것 이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단일예정론을 발전시켜서 멸망할 자와 구원받을 자의 이중 예정으로 발전시킨다. 어떤 자는 영생에 어떤 자는 영원한 저주에 예정되므로, 이 중 어느 한쪽에 이르도록 창조되므로, 우리는 그를 생명 또는 사망에 예정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칼빈의 예정이해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그의 주권에 의해 인간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홀로 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음과 윤리적 상태와 거룩함과 상관없이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선택하신 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죄 또한 제한된 예정된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은총을 주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어거스틴보다 더욱 철저한 예정을 말한다.
웨슬리의 예정은 어거스틴과 칼빈과는 달리 구원받을 자에게 대해서 초점이 맞추어 지지 않는다. 웨슬리는 예정론을 말하는 대신에 만인 속죄론을 이야기 한다. 그는 누구나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칼빈이나 어거스틴처럼 구원받은 사람을 정해놓은 예정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인에 대해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만인예정론을 주장하고 한다. 그리고 웨슬리는 한번 예수그리스도를 믿음 사람이 타락할 있다고 하여 칼빈이 주장한 견인의 은혜와는 상반된 입장을 폈다. 또한 칼빈이 말한 구원받는 자를 정해놓았다는 일반적 예정 대신에 특수예정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구원과 상관 없이 특수한 선교적 사명을 위해 예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질문은 왜 죄를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 앞에 선악과를 놔두셨어요라고 질문하는 것과 유사하군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의지가 없고 말잘듣는 로봇트나 인형으로 지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저 당신께서 원하는데로 바라시는데로만 움직이는 그런 인형같은 존재로 우리 인간들을 지으셔서 죄를 안짖고 영원히 같이 살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관계속에서는 분명 죄와 반역이라는 돌발사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겟지요. 그러나 잠시 생각해 봐요. 이런 관계에서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존재할 수 있을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상대방의 의지를 꺽고 내맘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대상의 인격과 생각을 존중해주며, 설령 그가 모자르고 부족하더라도 참고 기다려주며 바른 선택을 하도록 설득은 할 수 있지만 강권적이고 강압적으로 그를 억눌러 내게로 오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 신을 거절할 것을 알면서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또 만들었을까?"라고요?
그건 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지로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자신의 의지가 개입된 강요된 사랑을 인간에게서 받기보다는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진실된 사랑의관계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1. 절대주권과 자유의지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은 철저한 인본주의 신학이다. 그는 모든 것이-선택권, 결정권, 행동력-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실현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은 은총이전의 자유의지(타락인)와 은총이후의 자유의지(중생인)로 구분된 이중적 의지론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견해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독립적으로 구별함으로써 이원론(二元論)에 귀결되는 문제를 조성하게 되며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간의 상대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인식미숙의 결과이다. 박용기 목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절대자는 하나님이시요, 상대자는 인간이다. 하나님과 인간관계는 절대자와 상대자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요, 능동자와 피동자의 관계이다. 즉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주관자요, 지배자요, 자결권을 가진자요, 상대자인 인간은 따르는 자요, 지배를 받는 자요,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자이다. 특히 절대라는 관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어느 그 무엇의 도움이나, 간섭이나 장애를 받으시는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지는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종속된 의지이다.

2. 예정론과 자유의지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박하면서, 인간은 원래 무죄한 가운데 자유의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의 선행과 교리를 지킴으로써 스스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논자가 볼 때 그는 철저한 인본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에 반해 어거스틴의 예정설은 인간의 시조였던 아담만이 자유로운 의지를 지니고, 죄악을 범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가운데 오직 神意를 좇아서 불멸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사단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 모든 인간도 原罪의 씨를 물려 받아서 마침내 죄악을 범하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악에 물든 죽음에 던져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셔서 衆生을 구원하신다. 하지만 모든 인간을 구원하심도 아니고 인간이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神이 그들 중에서 일부에게만 은총을 베풀고 나머지는 선택의 범위에서 제외시킨다. 이와 같이 神의 意志에 따라서 결정지어지는 예정설을 진술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예정설은 어거스틴 자신에게도 근본적인 문제를 파생시켰다. 그것은 악에 대한 기원을 자세히 밝히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예정의 목적으로 삼아 진술함으로써 타락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악의 발생에 대한 설명을 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악에 대해서도 이를 단순히 善이 결핍된 정도로 정의한다.
결국 어거스틴의 고민은 惡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여길 수 없고 방관자로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악의 출처를 밝히기가 더욱 모호하게 된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거스틴의 논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귀결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신학적 한계는 예정의 목적을 인간의 구속을 위한 범주에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논의되는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한 계시적 범주이다. 즉, 계시의 형식인 언약과 성취의 근거로써 인간을 예정하시고, 예정하신대로 창조하시고, 예수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언약을 이루심으로써 선택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정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하고 주권적인 구원섭리에 나타난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악에 대한 문제는 과연 하나님의 영역 밖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답하면서 다음에 자세히 진술하기로 한다.

3. 自由意志와 責任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은 명령자이시다. 이것은 인간이 그 명령을 지킬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한도내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적인 자유의지를 소유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으며 이행하지 못한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을 당사자인 인간이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어거스틴의 주장은 펠라기우스의 견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어거스틴은 논술하기를 아담이후 타락한 인간은 惡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자유의지만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은총을 입은 인간에게는 善을 행할 수 있는 의지도 함께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결국 두 사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으므로 의지의 선택 결과에 따른 행동에 대한 책임도 인간이 담당해야 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논자의 견해를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밝히도록 한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절대종속된 자이다. 즉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며 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시조인 아담도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인 제약을 받는 종속된 몸이었다. 단 절대자 하나님께 종속된 상태에서의 종속된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타락한 이후에는 아담과 모든 인간들도 타락이전 아담이 소유했던 종속적 자유의지를 상실한 채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바울의 말처럼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6:16)고 말했듯이 전적으로 사망 권세의 다스림 안에서 종노릇하게 되는 노예의지만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중생한 자에게 있어서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죽었던 선택된 자들의 靈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다시 살아나게 된다. 하지만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아담이 소유했던 자유의지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전 아담은 죄의 저주가 덮이지 않은 몸-생령체-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생인은 아직도 죄의 저주가 덮인 육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중생인은 아직도 죄의 저주가 덮인 육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중생인은 자유의지에 있어서도 아담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겉사람은 죄의 법 아래 매여 죄의 노예가 된 상태이고 속사람은 성령의 절대적 능력으로 직접 장악을 받는 성령의 노예가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에게 독자적인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책임의 소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논자는 책임에 관한 개념적 성격을 분석해 봄으로써 그 해답을 얻고자 한다. 책임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인간 서로가 상대적인 입장에서 공통으로 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념은 절대 주권자 하나님으로부터 피조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지워지는 것이다. 책임이란 지워 주는 자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며 상대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는 책임이란 용어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며 하나님에게 책임을 지워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절대자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게 하시면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의 말처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19∼20)」라고 말했듯이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도 없으며 책임져야 되도록 부과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박 용기, 기독교 예정론, 진리의 말씀사, 1988.
박 용기,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 진리의 말씀사,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