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장 1-7절 말씀 묵상]
새해 2011년을 맞이하여 매주 수요기도회 때마다 무슨 말씀을 묵상할까 생각하다가 저는 “잠언”을 선택하였습니다. 성경 66권 중 제가 “잠언’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가 지난 약 6년 동안 구약 성경의 “지혜의 책”(The Books of Wisdom)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편”책(약 4년 반)과 “전도서” 책(약 1년 2개월)을 묵상하였기에 계속해서 지혜의 책을 묵상하고 싶어 “잠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계속 우리가 “지혜의 책”들을 묵상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2011년 새해를 맞이해서도 계속해서 지혜의 책 중에 하나인 잠언을 묵상하고자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제 자신이 미련하여 지혜가 필요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한다면 우리 온 교회 식구들이 지혜 있는 자들이 되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온 교회 식구들이 지혜있는 자들이 되어 때가 악한 줄 알고 세월을 아끼는 성도들이 되길 원하며 또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여 주님 뜻대로 살길 원합니다(엡5:15-17). 그래서 오늘 새해 2011년 첫 수요기도회를 맞이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지혜의 책인 “잠언” 말씀을 묵상하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잠언을 묵상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 “잠언”책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야 할 것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잠언”(Proverbs)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어느 한 교회 웹싸이를 보닌까 “잠언”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하고 있습니다(인터넷): “잠언”이란 말은 ‘비교’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마샬’에서 왔다. 이말의 동사형은 ‘다스리다’’지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아, 잠언은 사람의 행동을 다스리고, 지배한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마샬’이란 히브리어를 ‘箴言’으로 번역했다. 箴이란 ‘바늘’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찌르는 말’ 이라 할 수 있다. 잠언은 우리에게 ‘충고와 책망’ 뿐 아니라 ‘지혜와 명철’을 주는 ‘찌르는 말’이다.” 흥미로운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보다 John MacArthur 목사님의 설명이 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언들이란 짧고 간결하고 함축된 격언들로서 세월이 흘러가도 변치 않는(영원한) 진리와 지혜를 표현한다. 잠언들은 그것들을 읽는 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신적 원리들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할지 반영하게 만들므로 그들의 생각들을 증명한다’[The proverbs are short, pithy sayings which express timeless truth and wisdom. They arrest one’s thoughts, causing the reader to reflect on how one might apply divine principles to life situations (e.g., 2:12) ( MacArthur)]. 또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잠언의 저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장 1절을 보면 성경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잠언의 저자가 솔로몬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왕은 열왕기상 4장 3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잠언을 3천개를 남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염두해 둬야 할 사실은 잠언 전체가 다 솔로몬 왕이 쓰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잠언이란 책은 솔로몬 왕 외에 또 다른 저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잠언 24장23-34절의 부분 첫머리를 보면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고 하였는데, 여기 “지혜로운 자”란 말은 복수 명사로서 솔로몬 왕 외의 다른 지혜로운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곧, 잠언의 부분적인 말씀은 솔로몬 왕 외에 다른 저자들이 썼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이 지혜로운 자들이 잠언 30장 1-33절을 쓴 “야계의 아들 아굴”(1절)과 그 유명한 잠언 31장 1-31절을 쓴 “르무엘 왕”인지 아니면 지혜로운 자들 외에 또 다른 두 저자가 아굴과 르무엘 왕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체적으로 잠언 전체가 거의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이였던 솔로몬 왕이 썼지만 몇 부분은 다른 지혜로운 자들이 썼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지혜의 책중에 한권인 잠언은 솔로몬 왕이던 다른 저자들이든 다 지혜로운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솔로몬 왕과 다른 저자들이 왜 잠언이란 책을 썼는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솔로몬 왕이 잠언을 쓴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의 답은 오늘 본문 잠언의 서론(Prologue)인 잠언 1장 1-7절을 보면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잠언의 서론인 오늘 본문 잠언 1장 1-7절을 보면 우리는 잠언의 이중적인(two-fold) 목적(2-6절)과 잠언 전체를 요약하는 주제 구절(7절)을 보게 됩니다.
먼저, 잠언의 이중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한 두 가지로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잠언의 목적은 지혜와 훈계로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삶의 기술을 생산 하는 것(to produce the skill of godly living by wisdom and instruction)입니다(MacArthur).
오늘 본문 잠언 1장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for attaining wisdom and discipline). 여기서 “지혜”라는 히브리언 단어는 어원적으로 든든함(to be firm)을 의미하는데, 사물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공리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을 말합니다. 그리고 “훈계”는 훈련(discipline)을 의미합니다(박윤선). 즉, 잠언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우리는 잠언을 통하여 하나님께 신령한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공평하고 정직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박윤선). 곧, 우리는 잠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경건한 삶을 사는 신적 원리들(principles)만 배울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 신적 원리들을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해야 하는지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기술(skills)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이 반석 위에 든든히 세워져야 합니다. 또한 잠언은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줍니다(4절). 무슨 말씀입니까? 잠언은 어리석은 자들, 곧, 개방된 자들을 “슬기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젊은 자들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의 줏대가 없고 개방된 자는 이리 저리 외래의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잠언들)를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시비를 바로 분별하고 굳게 서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젊은 자들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비교적 조심하지 않고 덤비게 됩니다. 그러므로 젊은 자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노숙한 사람처럼 굳게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박윤선).
둘째로, 잠언의 목적은 분별력을 개발하는 것(to develop discernment)입니다(MacArthur).
오늘 본문 잠언 1장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To discern the sayings of understanding). 여기서 “명철”이란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말세 시대는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과 부재의 시대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지난 주일 신년연합예배 때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범사에 헤하려 좋은(선한)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고 버려야 한다고 배웠습니다(살전 5:21-22).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좋은(선한) 것들과 악한 것들을 헤아릴 수 있는(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여 어쩔 때는 악한 것을 취하고 선한 것을 버리는 삶을 살 때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이것은 사단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선과 악을 혼동(confusion)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하게 만듭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한다고 말한 후(창3:4) 오히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했습니다(5절). 선과 악을 혼동하게 만들어 우리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사단은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케 한 것처럼 우리를 미혹하여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케 만들므로 악을 범하게 만들고자 지금도 애쓰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하와처럼 명철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와가 명철하지 못하여 선악에 대한 분별력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결국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것처럼 우리들도 명철하지 못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므로 선을 취하여 행하기보다 악을 취하여 악행하므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명철을 얻어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1장 5절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우리의 학식이 더해져야 합니다. 왜 그리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그 학식이 우리를 더 지혜롭게 하며 더 명철하게 하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도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얻는 학식이 우리를 인도해 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날카롭게 하므로(by sharpening our mind) 가능합니다(MacArthur). 6절을 보십시오: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우리가 잠언을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그 잠언 말씀들을 깨달아 갈 때에 우리는 마음은 더욱더 날카로와져서 우리는 더욱더 지혜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적 분별을 가지고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히려 멸시합니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하므로 말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지혜로와 지고 명철해 져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선과 악, 좋은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하여 선을 택하고 악을 버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잠언 1장 7절을 보면 지혜자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잠언 전체를 요약하는 주제 구절을 알려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Fools despise wisdom and instruction.). 이 주제 구절의 핵심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지혜)의 근본이다’라는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학식을 더하라고 5절에서 말한 후 이렇게 7절에 와서는 “지식의 근본” 즉, 지식의 전제, 혹은 지식은 선두 또는 지식의 기초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박윤선).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 함은 구약 시대에 있어서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말함이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에게 대한 공포심을 가리키지 않고 그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고 두려워함을 의미한다”(박윤선). 그런데 저는 MacArthur 목사님의 정의가 더 마음에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세나 의지, 느낌, 행실과 목적들이 하나님의 자세와 의지와 느낌과 행실과 목적으로 맞바꿔있는 정신 상태이다’ [“The fear of the Lord is a state of mind in which one’s own attitudes, will, feelings, deeds, and goals are exchanged for God’s (cf. Ps. 42:1)”(MacArthur)]. 이 정의가 제 마음에 설득력 있게 다가온 이유는 작년 한 두 달 안식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셨던 마음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하나님게서 저에게 주신 마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제가 보시길 원하시며,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소리를 제가 듣기를 원하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느끼시는 것을 제가 느끼기를 원하고 게신다는 것이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결국 나는 간 곳 없고 주님만 보여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는 모든 것이 주님 중심이지 결코 자기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는 결코 자기 뜻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만을 구할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생각, 주님의 느낌, 주님의 자세와 의지, 주님의 행실을 본받아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 것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악을 선택하여 악을 가까이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악을 멀리아고 선을 사랑하고 가까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므로 선을 멀리하고 악을 가까이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미련한 자들의 정신 상태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자세와 의지와 느낌과 행실과 목적 등을 모르기에 선을 택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악을 선택하여 악한 자세와 악한 의지, 악한 느낌과 악한 목적 및 행실을 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미련한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시14:1).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는 전제 아래 삶을 살아가기에 악을 생각하고 악을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새해 2011년 첫째 주 수요기도회를 맞이하여 지혜의 책인 잠언의 첫 서론 부분인 잠언 1장 1-7절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매주 수요기도회 때마다 이 솔로몬의 잠언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잠언의 이중적인 목적과 잠언의 주제 말씀입니다. 잠언의 이중적인 목적은 지혜와 훈계로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삶의 기술(skill)을 생산 하는 것과 분별력을 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언의 주제 요절은 잠언 1장 7절 -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7절)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명심하고 계속해서 잠언 말씀을 묵상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잠언의 목적을 이루어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하고 영적 분별력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세움을 받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1년 1월 5일, 아버님께서 지어주신 이름 “지원”(지혜 “지”자에 으뜸 “원”자) 답게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은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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